고흐·모네 원작 같은 고품질 화집…“책도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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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름을 따서 출판사 이름을 지은 유화컴퍼니의 유화(47) 대표는 스스로를 망상가라고 표현한다. 작명법에서 엿보이는 그의 자의식은 잠시 제쳐 두자. 명화 원작과 다를 바 없는 그림 인쇄, 인화한 작품 사진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재현해내는 사진 인쇄가 그의 꿈이기 때문이다. 그런 목표를 향해 달려온 지 20년. 유 대표의 망상은 현실이 되는 느낌이다. 업계에서 “인쇄에 미친 X”쯤으로 통하며 회사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다.
이정진·이갑철 같은,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사진가들이 유화에서 사진집을 낸다.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여성 사진가 린다 코너, 실물 사이즈 고래 사진으로 유명한 브라이언 오스틴. 이런 외국작가도 고객이다. 매그넘 사진가인 미국의 데이비드 앨런 하비, BMW와 협업하는 프랑스의 브뤼노 레끼야르, 시인 박노해도 유화와 작업했다. 앞으로 더 늘어날 것 같다. 유 대표는 “다른 업체보다 사진집 제작비가 두 배가량 비싼데도 주문이 밀려 미처 소화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사진작가 이갑철씨는 “사진 인쇄 선진국 이탈리아에 비해 품질이 뒤지지 않는다”고, 대구의 사진전문 출판사인 마르시안스토리의 서민규 대표는 “퀄리티 높은 사진 인쇄에 필수적인 세퍼레이션(separation) 작업을 제대로 하는 국내 유일의 업체”라고 평했다.
이런 유화가 2018년부터 갤러리북을 시리즈로 낸다. 시리즈 이름처럼 미술관 원작과 같은 화질로 명화를 선보이겠다는 거다. 고흐의 그림을 1·2권으로 나눠낸 데 이어 최근 시리즈 3권 클로드 모네 편을 냈다. 세 권 모두 미술 저술가 김영숙씨가 개별 작품들에 대한 짧지 않은 분량의 설명을 붙였다.
가로·세로 각각 30㎝가량의 정사각형 모양 화집.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에서 봤던 고흐의 ‘해바라기’나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이런 색감이었나 싶다. 기억 속의 이미지보다 맑고 선명한 것 같다. 종이에서 광택이 나지 않는다. 비도공지(uncoated paper)다. 반짝거리는 도공지(coated paper)보다 잉크를 많이 잡아먹어, 잉크가 뭉쳐 ‘떡지는’ 문제가 해결된다면 보다 풍부한 색감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종이 표면이 살짝 올록볼록 엠보싱 처리돼 있어 작품 같은 물성이 느껴진다. 마음산책 출판사의 정은숙 대표는 “이 가격에, 이런 퀄리티의 대중 판매용 화집은 국내에서는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2만9800원, 정가를 두고 하는 얘기다.
유화의 인쇄는 어떤 점이 뛰어나길래 사진 예술가들의 인정을 받는 걸까. 갤러리북 가격을 굳이 저렴하게 책정한 이유는? 이런 궁금증을 안고 지난 6일 파주 출판단지의 출판사를 찾았다. 사무실 한구석에 인쇄 잉크 캔 수백 개가 쌓여 있다. 따로 주문한 ‘수제 잉크’라고 했다.
유 대표는 “시장조사를 해봤더니 30~40대 학부모가 아이들 책을 위해 지갑을 여는 상한선이 3만원이었다”고 했다. 갤러리북이 2만원 대인 이유다. 원래는 더 받아야 한다. 수입 종이, 수제 잉크를 사용하다 보니 제작비가 비싸질 수밖에 없다. 유화의 해결책은 크라우드 펀딩이었다. 펀딩 사이트 와디즈를 통해 1~3권 모두 1500부가량을 미리 팔았다고 했다. 권당 2만5000~6000원씩, 초판 5000부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
유 대표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어려서부터 미술을 무척 좋아했는데 변변한 미술 재료도, 미술 교과서 말고 그림을 볼 수 있는 곳도 없었다”고 했다. “원작 없이도 아이들이 명화의 벅찬 감동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게 지금과 같은 갤러리북을 내는 이유였다.
퀄리티 높은 사진집을 내는 비결은 복잡했다. 사실 문외한에게 ‘고품질’은 수상쩍은 영역이다. 유 대표 스스로 “고가의 아트북에서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아무나 느끼는 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다.
역시 앞에서 언급했던 세퍼레이션 작업이 비결이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사진작가가 찍은 디지털 카메라 안의 사진은 RGB(레드· 그린·블루) 파일 형태다. 이를 인쇄하려면 RGB를 CMYK 데이터로 변환해야 한다. 파랑·빨강·노랑·검정색 잉크를 아주 작은 색점 형태로 인쇄용지의 어떤 위치에 얼마나 뿌려줄지를 일일이 지시하는 게 CMYK 데이터. 그런데 국내 인쇄소는 대개 이 작업을 사진 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샵 기본값대로 한다. 기계에 맡기는 것이다. 유 대표는 “종이 종류만 수백 가지일 정도로 변수 많은 예측 불허의 인쇄 상황에서 언제나 최상의 인쇄 결과를 만들어내는 나만의 CMYK 데이터를 갖고 있다”고 했다. 이 데이터를 얻는데, 2002년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 두고 지금까지 20년이 걸린 거다. 종이·잉크의 물성은 물론 인쇄기까지 인쇄 공정의 전 영역을 빈틈없이 꿰고 있어야 해서다. 이런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 세퍼레이터다. 유 대표 이전 국내에는 없었던 미분화 업종이다.
- Q. 그런 노하우 터득이 쉽지 않았겠다.
- “가르쳐 주는 사람, 자료 없이 독학으로 깨우쳤다.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인쇄기를 빌려 수없이 인쇄 실험을 거듭했다. 돈이 떨어져, 통닭이 더 맛있어 보이는 전단지를 인쇄해주겠다고 치킨집 영업을 한 적도 있다.”
- Q. 국내에 세퍼레이션 영역이 공백이었던 이유는.
- “외국에서 인쇄기 들여와 상업적으로 찍어내기 바빴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미묘한 차이를 구현하는 연구와 실험은 뒷전이었던 거다.”
- Q. 아트북 시장은 전문적인 소수를 대상으로 하는 작은 시장 아닌가.
- “인쇄는 사양 산업이지만 책의 가치는 변하는 것 같다. 예전엔 정보만 잘 담으면 됐지만 이제는 퀄리티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 책이 예술이 되는 세상인 거다.”
유 대표는 세계적인 인쇄·출판 전문가는 명품 브랜드 인쇄물을 전담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Q. 유화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 “요즘 K팝 아이돌들은 앨범을 낼 때 포토북을 함께 낸다. 그런 책에 우리 기술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Q. 목표가 있다면.
- “쓸만한 중고 인쇄기를 구입해 인쇄 실험을 더 해보고 싶다. 다양한 인쇄 조건에 적용해 써먹을 수 있는 CMYK 데이터를 40벌 정도 갖고 있는데 이를 100벌까지 늘리고 싶다. 세계적인 퀄리티의 인쇄 품질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출처 : https://joongang.joins.com/?cloc=joongang-article-bi(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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